동유럽과발칸2개국

2014년1월22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동반자00 2014. 2. 12. 14:20

오전5시 기상 아침 7시 출발 8시

오늘의 일정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관광후 플리트비체로 이동

 

▼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ROSEN-HOTEL EUROPAHAUS의 아침 식사

 

 

▼ 쉘부른 궁전

    쉘부른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황제의 수렵용 궁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으며 궁전에는 1천400개의 방이 있으며

    궁전 내부는 화려하고 우아한 로코코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 쉘부른 궁전앞 거리 모습

 

 

 

▼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쪽에 벨베데르(Belvedere) 궁전(1721)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왕궁은 16세기 오스만 투르크 전쟁과 관계가 깊다. 빈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동쪽에 치우쳐 있었으므로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오스만 투르크인들의 침입을 제일 먼저 받았다. 오스만 투르크인들이 남기고 간 유물들은 칼스플라츠의 빈 박물관1) 및 빈 3구 병기창에 있는 전쟁사 박물관2)에서 볼 수 있다.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15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함락한 뒤 발칸 반도까지 진출해 살고 있었으며, 호시탐탐 '기독교 세계의 황금 사과' 빈을 노렸다. 빈은 그때마다 신에게 의지했다. 1529년에 술탄 슐레이만 2세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와 빈을 포위했지만, 빈의 추운 겨울 날씨가 그들을 물리쳤다. 1683년에는 술탄 무스타파 2세가 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이번에는 독일의 용병 2만 명이 지원군으로 와서 그들을 격퇴했다.

빈은 터키인들이 물러간 이후에 비로소 안심하고 도시 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다. 무너진 성곽을 보수하고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는 등, 새롭게 단장을 했다. 그 후 빈은 100년 동안의 평화가 지속되는 동안, 프랑스 파리와 견줄만한 국제적 바로크 문화권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잦은 전쟁은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양하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모든 자원이 왕실로 집중될 수 있게 하고 바로크 절대왕정이 탄생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지어진 벨베데르 궁전의 건축 양식을 보면, 기존 르네상스식의 단순한 축 병렬형 대신 건물의 중앙이 돌출된 형태이다. 이것은 빈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터키로 가는 길목의 높은 언덕에서 빈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건물은 마치 빈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인다. 이 건물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푸른 지붕이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의 지붕과도 흡사하지만, 베르사이유 궁전이 전 세계 오대양을 누비는 날렵한 군함처럼 생겼다면, 벨베데르 궁전은 단아하며 오스만 투르크 군대의 천막처럼 생겼다.

설계자 힐데브란트는 벨베데르 궁전 전체의 구조를 알레고리(은유)로 설계했다. 중앙의 정원을 사이에 두고 위채와 아래채로 나뉘어 있는 왕궁을 구경하려면, 방문객은 아래채에서 위채로 움직여야 하는데, 위채를 바라보며 무심코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비탈길 중앙에서 커다란 인공 호수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 다시 처음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와 정원의 왼쪽 또는 오른쪽 계단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는 지점에는 이집트의 스핑크스 여인상이 신비스런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거기를 지나 마침내 위채에 도달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방문객은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실내 공간이 어두워 답답하기 때문이다. 또 천정을 받치고 있는 헤라클레스 조각 기둥 네 개가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인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이제야 내부 공간이 환하다. 남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평원이 보인다. 왕궁을 설계한 힐데브란트는 권력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 천로역정의 순례의 길처럼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하려고 미로처럼 설계한 것은 아닐까?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그의 모습은 신왕궁(Neue Hofburg) 앞의 영웅광장에 가면 오늘날도 만나볼 수 있다. 앞발을 치켜 든 말을 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오스트리아의 드높은 기상과 영광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는 사실 프랑스 태생이었다. 그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이슬람 세계로부터 지키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중세 이후 다민족 도시가 된 빈은 출신에 개의치 않고 오이겐 왕자를 영웅으로 대접했다.

빈은 모든 세계인들에게 열린 도시였다. 다만 각 개인은 바로크식 건물처럼 중앙의 통일성 원칙에 따라야 했다. 개별자들은 제 자리에서 나름대로 개성을 발휘해도 되지만, 언제나 전체 속에 배치되어 리듬을 타야 했다. 빈 사람들은 이 원칙을 다음과 같이 부른다. "살아라! 그리고 살게 하라!(leben, und leben lassen!)" 이 원칙을 무시하는 사람은 이 도시에서 추방될 것이다.

현재는 겔러리로 사용 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로서,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고,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독일군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를 시작하여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았다. 성당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聖人) 슈테판에서 딴 것이다.

옛 건물이 가득 들어찬 구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다. ‘빈의 혼(魂)’이라고 부를 정도로 빈의 상징으로 꼽힌다. 공사기간이 65년이나 걸렸으며 건물의 길이가 107m, 천정 높이가 39m에 이르는 거대한 사원이다. 높이 137m에 달하는 첨탑과 25만 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이 눈에 띈다. 보헤미아 왕이 세웠던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도 남아 있다.

건물 내부에는 16세기의 조각가 안톤 필그람이 만든 석조 부조의 설교대와 15세기 말에 만들어진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 석관이 있다. 그밖에 마리아와 예수상이 있고,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지하에는 1450년에 만든 지하유골 안치소 카타콤이 있는데,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유골 약 2,000구와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을 담은 항아리 및 백골이 쌓여 있다. 모차르트의 결혼식(1782)과 장례식(1791)이 치러진 곳이며, 빈 시민들은 매년 12월 31일 슈테판대성당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는다.  

 

 

 

 

 

 

 

 

▼ 슈테판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