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행행사

2010년3월14일 영주시단산면~고치령~김삿갓유적지

동반자00 2010. 4. 29. 17:03

고치령과 김삿갓

 

▴ 고치령(760m) -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와 마락리를 잇는 고개다.  

 

풍기에서 부석사 가는 931번 도로상에 있는 단산면 소재지 옥대리에서 북쪽으로 좌회전한다. 고개 넘어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까지 50리쯤 된다.  

고치령은 영주(옛 순흥) 일대 상인들이 소금 · 생선 · 생필품 따위를 지게에 지고 마락리 · 의풍리 · 영월 등에 팔기 위해 넘나들던 옛길이다. 또 형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해 순흥에 유배된,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위해 영월로 보낸 밀사들이 이 길을 넘었다고 한다.

 

1. 순흥면에서 좌석리 · 마락리 표지판 보고 직진해 오르면 옥대리다.

길 오른쪽으로 700년 이상 살아온 은행나무 두 그루가 차례로 나타난다.

단산면 옥대초등학교는 1964년 개교해 1991년 문을 닫았다.

 

2. 단산저수지를 지나 5㎞ 남짓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는 윗좌석 · 아랫좌석 · 독점 · 조재기 그리고 연화동 등으로 이뤄진 좌석리의 중심마을이다.

좌석리에는 1960년대까지 120여 가구가 화전을 하며 살았다. 지금은 60여 가구가 골짝골꼴이 흩어져 산다.

 

3. 삼거리에서 좌석2교 건너 좌회전해 웃좌석으로 오르다 보면 왼쪽 사과밭에 앉은 집채만한 바위 앉은바위를 만난다. ‘좌석리’라는 마을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이 바위를 신체로 삼아 정월 初丁日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낸다.

내려와 고치령 쪽으로 좀더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고, 좌석 분교를 지나 좀 더 가면 왼쪽이 연화동, 곧장 가면 고치령이다. 연화동으로 2㎞를 들어가면 동 · 서 두개의 폭포가 있는데 서폭포가 아름답다고 한다.

 

4. 연화동 갈림길부터 고치령으로 오르는 울창한 숲길이 시작된다. 2㎞쯤 오르면 첫 비포장길, 이어 포장 · 비포장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포장 끝나는 지점 왼쪽엔 주민들이 망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 이 고갯길에 들끓던 도둑들이 망을 보던 바위라고 한다. 건너편에는 20명이 들어앉을 수 있는 굴이 뚫린 도둑바위가 있다.

계곡 물소리는 잦아들고 비포장길이 이어진다. 조림된 이깔나무 숲길을 한동안 오르면, 껑충한 장승들이 지키고 서있는 널찍한 광장 고치령 정상이 나타난다. 연화동 들머리에서 이곳까지 4.5㎞이다.

 

5. 고치령에 이르면 태백이 끝나고 소백이 시작된다. 왼쪽으로 형제봉(1178m) · 국망봉(1420.8m) · 비로봉(1439.5m) · 도래기재(794.2m), 오른쪽으로는 마구령(894m) · 늦은목이 · 선달산(1236m) · 박달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길목이다.

고갯마루에 산신당이 있다. 2001년 10월에 갔을 때는 없어졌더니(2001년 5월에 불탔다고 한다) 그뒤 다시 지은 것이다. 태백산신과 소백산신을 함께 모신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영월에서 죽은 단종은 태백산신, 순흥에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은 소백산신이라 믿는다. 정월 열 나흗날에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당 남쪽의 물은 낙동강으로, 북쪽의 물은 한강으로 간다.

 

6. 샘물(찬물샘터)은 고개 넘어 100m 지점 왼쪽에 있다. 흙길을 따라 2.5㎞쯤 내려가면 새목이라는 빈 집들만 남은 주민 없는 마을이 나온다. 다시 물길을 만나는데, 넘어온 좌석리쪽 계곡물은 낙동강 상류인 반면 이 물길은 영월 거쳐 단양으로 흘러드는 남한강의 지류다.

 

7. 좀더 내려가면 오른쪽 절벽에 말굴이(말굽이)라 부르는 곳이 나온다. 옛날 짐 실은 말들이 여기서 자주 굴러 떨어졌다고 하고, 마을 앞 골짜기 바위에서 영월과 순흥을 오가던 단종과 금성대군의 밀사가 탄 말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얻은 이름이라 한다.

馬落里는 백두대간을 넘어 한강수계에 있으면서도 경상도땅이다. 마락리 계곡물은 부석면 남대리 골짜기와 함께 경북 지역에 있는 유일한 한강 수계이고 마락리는 산속에 갇힌 경북의 외딴 섬 같은 오지이다.

 

마락리란 이름은 ‘말굴이’란 고유 지명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말[馬]이 굴러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말굴이는 ‘말’과 ‘구리’의 합성어이다. ‘말’은 말무덤(큰무덤), 말벌(큰 벌)처럼 ‘큰’이라는 뜻이다. 본디 위, 또는 높음, 신성함, 처음의 뜻이다. 신라왕의 호칭 마립간, 인명에 마로[夫‧宗] 등이 그 예이다. 또 ‘말’은 ‘맏’을 뿌리로 한 것으로 보인다. ‘맏’은 ‘큰’, ‘처음’의 뜻이다. ‘맏+앙>마당’의 ‘맏’은 넓음의 뜻이다. 맏이는 형제 중 첫째라는 뜻이다.

‘맏’은 처음, 위, 높음 등의 뜻을 가진 옛말인데 ‘말’로 개음절화한다. 다시 ‘마리’, ‘마루’, ‘마라’ 등으로 연철한다. 마리산, 마라섬 등이 그 예이다.

‘구리’의 어근은 ‘굴’이다. 굴(窟)의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 우 모음이 본디 오에서 왔을 것이다. ‘골’은 대개 谷과 洞으로 옮겨졌다. 골은 처음부터 마을을 형성해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라 골짜기나 깊은 골에 사람이 정착하면서 골의 이름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말+골=말굴 또는 말골>말굴>말구리’로 변한다.

그러므로 말골은 큰마을, 큰 골짜기 또는 으뜸마을 초입(길목), 위쪽마을 등의 의미일 것이다. 문경의 하늘재를 말구릿재라고도 했다.

 

8. 청소년야영장이 나타나면 마락리 마주바위다. 골짜기를 따라 물가에 마락리 서낭당이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초나흗날과 시월 초에 고치령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새목 주민들이 지내던 것을 이어받았다.

 

9. 서낭당을 지나 ‘경상북도 경계’ 표지석이 선 셋밭을 지나 내려가면 의풍이다. 의풍 골짜기에는 여섯 집이 사는 魚隱洞이 있다. 뒤편에 있는 삼도봉(1,063m)은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이다. 정감록의 십승지이다. 단양군 영춘면에 속하는 충청도 제일의 오지마을이다. 산마을 치고는 농사가 잘 된다. 특히 고추와 대추가 잘 된다.

 

9. 300년 된 느티나무 4그루가 모여 있는 의풍1리(와곡마을)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2㎞쯤 가면 김삿갓의 무덤이 있는 와석리 노루목이 나온다. 이곳은 영월군 하동면이었다가 2009년 10월 김삿갓면으로 바꾸었다.

노루목 김삿갓 무덤에서 왼쪽 김삿갓 서낭당 앞으로 난 길을 따라 2km쯤 가면 김삿갓의 생가 어둔리가 나온다.

 

10. 동쪽으로 우회전해 남대리를 지나 마구령(820m)을 넘으면 부석사 기슭으로 내려서고, 서쪽으로는 영춘으로 넘는 50리 베틀재가 있다.

 

※ 嶺과 岾은 고개와 같은 의미, 峴은 비교적 낮은 안부, 峙는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은 곳의 안부이다.

현의 경우는 고갯길이 나있으나 치는 고갯길이 형성되지 않고 다만 험준한 산줄기 가운데 말안장처럼 오목하게 들어간 지형을 뜻한다.

 

  

김삿갓이 살던 집 

 

김삿갓이 살던 집 

 

김삿갓 무덤 

 

 

와석리 서낭당

 

 

 

■ 김삿갓이 살았던 집 - 영월군 김삿갓면 어둔리에 있다.

김삿갓이 살던 집은 노루목의 묘 앞의 두 갈래 길 중 서낭당이 있는 왼쪽 길로 2km쯤 올라간 어둔이라는 곳에 있다. 이곳에는 화전민의 집들이 더러 있는데, 회전민의 집은 기둥ㆍ천장보 등이 모두 통나무로 돼 있으나 김삿갓의 집은 네모지게 다듬어져 양반이 살던 집임을 알 수 있다. 또 안채 자리 축대의 돌 빛깔도 김삿갓 묘의 축대 돌 빛깔과 같다.

김삿갓은 이 집에서 2년쯤 살았다.

 

■ 김삿갓의 묘 -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다. 이곳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과 영월군의 경계지역이다.

    태백산과 소백 산의 사이인 양백지간이다. 남사고는 <격암유록>에서 십승지의 하나라 했다.

 

이곳에 있던 이장무덤은 비석이 없었고 자손들도 돌보지 않아 오랜 세월 버려져 있었다. 이 무덤이 김삿갓의 묘로 확인된 것은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씨의 10여년에 걸친 탐문과 고증작업의 결과였다. 박씨는 지난 1970년대 초반에 ‘영월에 김삿갓의 묘가 있다’는 말이 떠도는 것을 듣고 묘 찾기에 나섰다. 김삿갓에 관한 구전증언을 모으고 관련 서적들을 뒤진 끝에 ‘김삿갓의 묘는 양백지간, 영월ㆍ영춘어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영월군 와석리 노루목을 뒤지던 어느 날, 근처에서 3대째 살아 온 노인으로부터 묘와 살던 집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장된 지 116년 만인 지난 1982년의 일이었다. 박씨는 ‘10년을 찾아 헤매다 막상 노루목과 어둔에 가보니 그곳에서 대를 이어 살아 온 주민들은 그 위치를 모두 알고 있었다’며 ‘그의 이런 삶의 흔적들이 바깥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자손들이 유랑걸식했던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세상 사람들도 무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金炳淵(1807~1863), 자는 性深 호는 蘭皐, 본관은 안동이다. 경기도 양주 출신이다.

    늘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 데서 金笠 또는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김삿갓의 방랑 인생은 조선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져 가던 19세기 전반기의 시대상황과 얽혀 있다. 중앙에서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지배질서가 문란해지고, 전국 각지에서는 양반관료들의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항거하고 나서던 시기였다.

 

김병연이 다섯 살 때인 순조 11년(1811년) 12월, 조정에서 서북인을 등용하지 않는데 불만을 품은 홍경래가 농민들의 호응을 얻어 평안도 박천군 다복동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른바 홍경래의 난이다.

홍경래 무리는 반기를 들자마자 가산군을 함락한다. 이때 가산군수 정시는 포로가 되어서까지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한다. 홍경래군은 정주ㆍ박천ㆍ곽산 땅을 휩쓸고 김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부사로 있던 선천을 공략한다. 김익순이 선천 防禦使로 부임한지 3개월째 되던 날이었다. 김익순이 술에 취해 누워있는데, 홍경래 군이 몰려와 그를 결박하고 항복을 받는다. 포로가 된 김익순은 홍경래 군에 투항해 목숨을 건진다. 난은 이듬해 봄 관군에 의해 평정된다. 그러자 김익순은 ‘역적’에 투항한 죄를 면하기 위하여 홍경래군 장수의 목을 돈을 주고 사서 조정에 바친다. 그러나 이것마저 발각되어 김익순은 참형을 당하고 집안은 폐족처분이 내린다.

 

김병연의 부친 金安根은 자식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병연과 병연의 형 炳河 형제를 하인 金聖秀에게 부탁하여 어머니 함평 이씨와 황해도 곡산에 있는 이종의 집에 가 숨어살게 하였다. 병연의 어머니는 이런 집안의 내력을 숨기고 병연에게 공부를 시켰다. 그뒤 익순의 죄가 자손에게까지 연좌되지 않음을 알고 다시 가정을 꾸몄다. 곡산에서 14년쯤 살았다. 그러나 세인의 멸시와 학대가 심하자 황해도 곡산에서부터 광주ㆍ이천ㆍ가평ㆍ평창을 거쳐 산골로 산골로 숨어들어 강원도 영월까지 와 살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병연은 입신양명을 위해 과거를 준비하였다.

 

20살의 김병연은 향시인 백일장에 나가 김익순을 조롱하는 글을 써서 장원급제한다. 백일장의 시제가 “정시 가산군수의 충절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라(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痛于天)”였던 것이다. 김병연은 “……네 혼은 황천에도 가지 못할 것이고/ 땅에 묻히려도 선왕들께서 허락하지 않으리라./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번은 오히려 가벼우니 만번 죽어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 동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고 김익순을 비난하였다.

그 김익순이 바로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뒤늦게 어머니로부터 듣고 자책과 번민에 빠진다. 출세를 위한 과거가 조상을 욕하는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22살 되던 해 고행에 가까운 방랑길에 오른다. 이때 큰 아들 翯均이 태어난다. 그러나 돌보지 않고 처자도 집도 버리고 떠난다. 24세 때 집으로 돌아와 차남 翼均을 낳고 나간 뒤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번도 집을 찾지 않았다. 익균이 세 번이나 병연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 하였으나 끝내 뿌리치고, 평생 방방곡곡 죽장에 삿갓 쓰고 미투리를 신고 떠돌면서 해학과 풍자로 세상과 자신을 조롱하였다. 방랑생활을 하다보니 옷차림은 언제나 허술하였고, 체모를 내세울 것이 없었으니 갓 같은 것은 아예 생각 밖이고 삿갓이 오히려 어울렸다. 삿갓은 햇볓을 가려주었고, 비올 때는 우산 구실도 하며 하늘을 부끄러워하며 사람을 꺼리는 마음을 가려줄 수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삿갓을 쓰고 다니면서 평생을 방랑하며 서러운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김병연을 김삿갓이라 하였다. 철종 14년(1863년) 3월 전라남도 동복면에서 57세로 객사할 때까지 35년간을 유랑하며 가는 곳마다 시와 일화들을 뿌렸다.

 

동복에 묻혔던 그의 시신은 그로부터 3년 뒤 둘째 아들 익균이 영월땅 하동면(지금의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이장했다.

김삿갓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익균은 楊州에서 강원도 평창군 泉洞으로 가서 훈장 노릇을 하며 평범한 일생을 보냈는데, 슬하에 장남 澤鎭, 차남 榮鎭 형제를 두었다. 택진은 20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나무를 해서 팔아 동생 영진을 서당에 보냈다. 영진은 15세 때 건봉사로 가서 승려가 되었다. 4년 동안 공부하고 서울에 있는 절로 옮겼다. 그는 용모가 준수하고 명민하여 당시 그 절에 자주 드나들던 궁중 나인이 그의 인품을 아껴 고종황제에게 천거하였는데, 황제는 그가 김병연의 후예임을 알고 그를 승적에서 배내 대궐에서 일하게 하였다. 처음 궁내부 主事, 다음 別軍職과 황제의 시종을 지냈다. 홍천군수가 되었다가 다시 慶興府尹으로 임명받고 부임할 때 아들 景漢이 태어났다. 이로인해 집안의 몰락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진은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강탈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여주로 옮겨 양조장을 경영하여 돈을 많이 벌었고, 만년에는 절을 지어 다시 불경을 읽으며 세상을 마쳤다.

 

당시 휘문고등학교를 나온 경한은 ‘나라가 망했으니 벼슬할 생각말고 사업을 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27세 때 2년간 몸담았던 산림주사직을 버리고 양평군 용두리로 가서 양조장과 목재상, 묘목 사업에 종사한다. 사업이 번창하여 양주군 일대의 유지가 되었고 4년간 초대 도의원을 하기도 했다. 또 군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춘궁기마다 양곡을 희사하여, 사람들은 그의 頌德碑를 세웠다. 1962년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고, 중풍이 겹쳐 1977년 세상을 떠난다. 현재 경한의 아들 곧 김삿갓의 4대손 析東씨가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에 살고있다.

 

※ 난고 김삿갓 문화 큰잔치는 10월 7일~8일에 열린다.

 

※ 김삿갓과 관련된 일화

1. 김삿갓이 방랑중에 들른 한 농가에서 “양반세도가가 선산 묘자리를 명당이라고 빼앗아 자기 딸의 묘자리로 썼다”는 하소연을 듣는다. 이에 김삿갓은 “사대부의 따님을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눕혔으니 할아버지 몫으로 하오리까 아버지 몫으로 하오리까”라는 한시를 써 그 세도가에게 갖다주도록 했다. 그러자 문제의 세도가는 딸을 다른 데로 옮겨 묻었다 한다.

 

2. 어느집에서 잠시 쉬어갈 때의 일이다. 김삿갓이 떠난 뒤 밥을 먹으려고 제법 유식한 주인 마누라가 破字로 ‘人良且八’하자 남편이 ‘月月山山’이라 대답하였다. 그러자 김삿갓은 ‘犬者禾重 丁口竹天’이라 하였다. ‘人+良+且+八’은 ‘食具’의 파자로 ‘밥상을 올릴까요’라는 뜻이다. (또는 ‘人良卜一’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이는 ‘食上’이니 결국 같은 뜻이다) ‘月+月+山+山’은 ‘朋出’의 파자이니 ‘벗이 가거던’하는 뜻이다. 김삿갓의 말은 ‘猪種可笑’의 파자로 ‘돼지 새끼들아 가소롭다’라는 뜻이다.

 

3. 언젠가 사람이 죽어 부고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柳柳花花’라 써주었다 한다. 버들버들하다가 꽃꽃해졌다는 뜻이다.

 

4. 김삿갓이 개성에 갔을 때 어느집 문앞에서 하루밤 잠을 청했다. 집 주인은 땔감이 없다며 문을 닫아걸었다.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邑名開城何閉門 山名松嶽豈無薪”(고을 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며 산이름이 송악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느냐)

 

※ 김삿갓의 시

김삿갓의 시는 일제강점기 李應洙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시편들을 수집하여, 1949년 <金笠詩集>이란 제목으로 학예사에서 문고판으로 간행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 浮浮我笠等虛舟 一着平生四十秋 牧堅輕裝隨野犢 漁翁本色伴白鷗

醉來脫卦着花樹 興到携登翫月樓 俗子衣冠皆外飾 滿天風雨獨無愁 (詠笠)

떠돌아다니는 내 삿갓 빈배와 같아/ 한번 쓰니 어느덧 사십평생일러라./

소치는 더벅머리 목동 들로 갈 때 차림이고/

갈매기 벗삼아 고기잡는 늙은이 그대로일세./ 취하여 벗어 나무에 걸고 꽃구경하고/

흥 일면 손에 들고 누각에 올라 달구경이네./ 속인의 의관이야 겉을 꾸민 것이지만/

내 삿갓은 하늘 가득 비바람 몰아쳐도 홀로 근심 없다네.

 

2. 嗟乎天地間男兒 知我平生者有誰 萍水三千里浪跡 琴書四十年虛詞

靑雲難力致非願 白髮惟公道不悲 驚罷還鄕夢起坐 三更越鳥聲南枝 (自嘆)

슬프도다! 천지간 남아여/ 내 평생 아는자 그 누구인가?/

부평초같이 삼천리 유랑했으니/ 거문고 타고 글 읽은 사십년 허사로구나./

청운의 꿈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우니 원치않고/

백발이야 뭇사람도 한가지니 슬퍼하지 않노라./ 다만 귀향의 꿈꾸다 놀라 일어앉으니/

깊은밤 월조 울음만 남쪽 가지에서 들려오도다.

 

3. 松松柏柏岩岩繪 水水山山處處奇 (金剛山)

소나무 소나부 잣나무 잣나무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아가니/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기기묘묘하구나.

4.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疑 平生詩爲金剛惜 及到金剛不敢詩 (答增金剛山詩)

꼿꼿 뾰족 뾰족 괴괴한 경개가 하 기이하여

사람도 신선도 신령도 부처도 모두 놀라 참말인가 못믿네

내 평생 소원 이 금강산을 읊으려고 별러왔건만

이제 금강산을 대하고 보니 시는 못쓰고 감탄만 하는구나.

 

5.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飯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二十樹下)

스므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망할놈의 집에서 쉰밥을 주는구나./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쏜가./ 내집에 돌아가 쉰밥을 먹음만 못하리.

 

6.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竹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萬事不如吾心竹 年年年世過然竹 (竹詩)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며/ 옳은 것 옳다, 그른 것 그르다 저대로 부치세./

손님 접대는 가세대로 하고/ 시정 매매는 시세대로 하세./

모든 일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살아가세.

 

7. 泛舟醉吟(배를 띄우고 취해서 읊다)

江非赤壁泛舟客 강은 적벽강이 아니지만 배를 띄웠지.

地近新豊沽酒人 땅은 신풍에 가까워 술을 살 수 있네.

今世英雄錢項羽 지금 세상에 영웅이 따로 있으랴, 돈이 바로 항우이고

當時辯士酒蘇秦 변사가 따로 있으랴, 술이 바로 소진이지.

 

김삿갓 종명지-전라남도 함평군 동복면

 

김삿갓 초분지 

 

김삿갓 시비-동복면 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