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사터
■ 무장사터는 경주시 암곡동 산1번지에 있다.
무장사 창건에 관해 <삼국유사-제3권 塔像 제4> 鍪藏寺 彌陀殿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무장사가 있으니 신라 제38대 원성대왕 아버지 大阿干 孝讓, 즉 추봉된 명덕대왕의 숙부 波珍湌을 추모해서 세운 것이다.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세운 듯하다. 그곳은 깊고 어두워 저절로 虛白이 생길 것이니, 이야말로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절의 위쪽에 아미타의 古殿이 있다. 곧 昭成대왕의 비 桂花王后가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왕후는 근심에 차서 황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했다.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명복을 빌 것을 생각했다. 이에 서방에 아미타라는 大聖이 있어 지성으로 그를 믿으면 잘 구원하여 맞아준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 하고는 이에 六衣(왕후가 입은 6가지 옷)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九府(財幣)에 저장해 두었던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공인들을 불러서 아미타불상 하나를 만들게 하고, 신중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늙은 중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날 꿈에 眞人(부처)이 석탑 동남쪽 언덕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대중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것이다.”라 생각하고 마음속에 숨겨 두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원래 바위가 험하고 시냇물이 급하게 흐르므로 工人들은 돌아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 했다. 그러나 터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을 얻어서 집을 세울 만하여 확실히 신령스러운 터와 같으니 보는 이들은 깜짝 놀라고 좋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근고에 와서 미타전은 허물어지고 절만 홀로 남아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라 한다.”고 한다.
1. ‘鍪藏’이란 말은 병장기를 감춘다는 뜻이다. 무장사터는 본디 백제를 정복한 제29대 태종무열왕(654~661 재위)이 병장기와 투구를 매장한 곳이라 한다. 병기가 필요없는 평화스러운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뒤에 절을 세우면서 무열왕의 뜻을 좇아 무장사라 이름 지었다 한다.
2. 무장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의 아버지인 대각간 孝讓이, 그의 숙부 파진찬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원성왕은 제17대 내물마립간(356~402)의 12세손으로 전왕 宣德王(780~785)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효양은 만파식적을 신문왕에게 전한 사람이다.
원성왕의 아버지가 지었다면 무장사는 8세기 중엽쯤에 창건되었을 것이다.
3. 원성왕의 두 아들은 일찍 죽고, 맞손자 俊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제39대 소성왕(798~800)이다. 그는 왕이 된지 겨우 1년 5개월 만에 죽는다. <삼국사기>에 왕이 죽은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려 보냈으며, 서란전의 발은 날려간 곳을 알 수 없고, 임해문과 인화문이 무너졌다”고 적었다.
미타전은 소성왕의 왕비 桂花王后가 남편 왕을 위해 지었다면 9세기 이후 어느때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성왕이 죽을 때 큰아들 청명은 13살이었고, 그 동생으로 체명과 여동생 章和가 있었다.
왕의 자리는 맏 아들 청명이 이어받아 애장왕(800∼809)이 된다. 그러나 나이 어린 아들 애장왕은 10년을 근근이 버티다 가 숙부 金彦昇의 칼에 맞아 죽는다. 김언승은 제41대 헌덕왕(809~826)이 된다.
체명은 형 애장왕을 호위하다가 역시 반군에게 죽는다.
막내딸 장화는 반군편에 가담한 자신의 숙부인 秀宗에게 시집갔으나 남편 수종이 제42대 흥덕왕(826~836)이 된지 2개월 만에 죽는다.
신라 하대의 혼란스러운 정국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흥덕왕이 죽은 후 마지막 왕 제56대 경순왕(927~935)이 왕건에게 나라를 바칠 때까지 신라는 근 100년 더 이어진다. 이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조상들이 이룬 문화적 힘 때문일 것이다. 이 100년 동안 왕은 13번이나 바뀐다.
애장왕이 죽자 남편
을 잃고 어린 아들을 왕위에 올린 계화왕후는, 일연스님의 표현대로, “슬픔이 지극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마음은 가시에 찔리는 듯”하였을 것이다. 그런 왕후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절터 위쪽에 미타전을 지었던 것이다.태종무열왕은 무기를 감추었지만, 후손들은 "허황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빈 마음[虛白]이 생겨 도를 즐길 만한 곳"으로 이 터를 찾아 이미 있는 절에 미타전을 새로 지었을 것이다.
4. 일연스님(1206~1280)이 이곳을 찾았던 고려 중엽 까지는 절은 남아있었으나 미타전은 허물어졌다고 한다. 조선 중종때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그때까지는 절이 있었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자세히는 알 수 없고 다만 조일전쟁때 폐시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현재 미타전의 자리라 생각되는 곳에 10개의 주춧돌이 남아있다.
그밖에 비받침과, 비머리, 그리고 삼층석탑이 있다.
* 삼층석탑(보물 제126호)은 무너져 숲속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63년에 복원했다. 전체 높이 4.9m로 통일신라 전형양식이다. 하층기단은 하대석과 중대석을 붙여 8매로 짜고, 중대석에는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 2개를 새겼다. 하층기단의 덮개돌은 8매로 구성하고 윗면에 약간의 경사를 주었다. 상층기단의 중석도 8매로 구성하였지만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은 새기지 않고 안상 2개씩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상층기단의 덮개돌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있고 밑에는 부연을 나타냈다. 덮개돌 상면 중앙에는 각형 2단 굄 장식을 두어 탑신부를 받치게 했다.
탑신부는 지붕돌과 몸돌이 각기 다른 돌로 되어있고, 몸돌의 각면 귀퉁이에는 층마다 모서리기둥이 있다.
1층몸돌은 높은 편이다. 각층의 지붕돌은 파손되었으나 체감률은 좋은 편이다. 지붕돌받침은 각층 5단이며 추녀 밑은 직선이다.
1층몸돌에서 1면 길이 27.5cm 깊이 23cm의 사리함이 나왔다.
* 아미타조상 사적비 이수 및 쌍귀부(보물 제125호)는 효성왕의 왕비인 계화왕후가 왕이 죽은 뒤, 아미타전과 아미타불을 만들 당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에는 목이 잘린 거북받침[귀부] 비머리[이수]만 있다.
귀부는 아미타사적기를 받쳤던 비받침이다. 두 마리의 거북이가 비석 받침대를 지고 있는 모습으로 높이 1.33m이다. 두 거북은 목이 잘려나갔으나 발가락의 조각은 잘 남아있다. 구름 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있는 모양이다. 거북의 발은 왕비가 죽은 남편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합장한 것 같다. 왼쪽 거북은 왕, 오른쪽 거북은 왕비일 것이다. 그 사이에 여성을 상징하는 역삼각형이 있다.
거북 등에 얹힌 장방형의 비석 받침대 네 면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점이 특이하다.
쌍귀부는 1963년 보물 지정 당시에 이미 碑身은 없어지고 그 받침돌인 쌍귀부 머리 중 한 쪽만 파손된 채 남아 있었다.
그것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다가 2008년 11월 20일 문화재청이 경주시와 합동으로 무장사 아미타불상 사적비 비신 복원을 위한 현지조사 과정에서 비받침 왼쪽 머리 1점을 찾았는데, 문화재청은 “귀부 양식이 거북머리에서 용머리로 변화해 가는 중간단계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했다.
비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경주시지>에 따르면, 정조때 경주 부윤 홍양호(1724~1802)란 사람이 김생의 글씨를 찾기 위해 무장사지를 추적하던 중 마을 사람들이 맷돌로 쓰고있던 비석 일부를 찾았다. 이미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이 심했다. 그후 조선 순조 17년(1817) 추사 김정희가 산산조각 나 흩어지고 없어진 비 조각 중 2점은 찾았고, 이어 1914년 또 1점이 발견되었는데, “奉造阿彌陀佛”, “大奈金陸珍”, “阿彌陀佛□□” 등 글자가 판독되어 이곳이 신라시대 무장사 터임을 알게 됐다.
비에 새겨진 글씨는 왕희지 글씨의 집자라고도 하는데 추사 김정희도 빼어난 글씨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비문은 大奈 金陸珍이 썼다.
이 사적비는 소성왕의 왕비인 桂花王后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무장사에 봉안하게 된 내력을 새긴 아미타불조상사적비이다.
무장사 터에서 조금 더 가면, 이곳 사람들이 동대산이라 부르는 확 트인 정상부가 나온다. 1975년 동양제과에서 오리온 목장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돌보는 사람이 없고 황량한 억새밭만 남아있다.
※ 무사시노(武藏野) - 東京의 서남쪽 분지를 무사시노라 한다. 무기를 감춘 곳이라는 뜻이다. 신주쿠를 출발해 무사시노를 향하는 열차로 한 시간 남짓 가면 분지가 끝나는 곳에 고마무라(高麗村)가 나온다. 이곳은 고구려 유민들의 마을이다. 관동지역 고구려유민 1799명을 집단 이주시켰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성이 고려씨이었다. 병풍처럼 산이 둘러치고 고마가와(高麗川)가 휘돌아 가는 요새에 만들어진 마을이다. 거기에 고마진자(高麗神社)가 있고, 옆에 고려가 주택이 있다. 협곡에 무기를 감추고, 제 목숨을 지키자고 웅크렸다가, 때가 오면 절을 짓고 외로운 혼의 명복을 빌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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